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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서사에 담긴 감정 구조 (폭력, 연민, 충돌)

by 집주인언니 2025. 9. 15.

호메로스 서사에 담긴 감정 구조 (폭력, 연민, 충돌) 관련 사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단순한 전쟁과 귀환의 서사를 넘어서, 인간 감정의 정교한 층위를 드러낸다.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 속 인물들은 단지 ‘전사’ 혹은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분노, 연민, 후회, 용서—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다. 이 글에서는 호메로스 서사에 담긴 ‘폭력’, ‘연민’,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충돌’을 중심으로 고대 서사가 인간 본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드러내는지를 분석해본다.

폭력: 인간 본성의 본능적 발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분출되고, 통제되지 못한 채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사다. 작품의 시작부터 ‘분노’는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다.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이 첫 문장은 곧 작품 전체가 ‘분노’와 그로 인한 ‘폭력’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전장에서 물러나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동료가 죽는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구조를 어떻게 붕괴시키고, 폭력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곧 파괴이며, 감정은 전쟁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무기화된다. 또한 폭력은 개인 간의 싸움뿐 아니라 집단적 행위로도 나타난다. 트로이 전쟁은 명목상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예, 권력, 패권을 둘러싼 구조적 폭력의 결정체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사는 서로를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하며, 신들조차도 인간의 전쟁에 개입해 폭력을 부추긴다. 아레스, 아테나, 아폴론 등 다양한 신들이 인간의 분노와 충돌을 자극하며, 이 전쟁이 단순한 인간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구조적 본성’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이러한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일리아드』는 전쟁의 영광만큼이나 참혹한 죽음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창이 어떻게 살을 찢는지, 죽음 직전 인물의 눈빛이 어떻게 흐려지는지, 동료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전투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묘사함으로써 폭력이 갖는 잔인함과 슬픔을 강조한다. 이는 독자가 단지 전쟁의 영웅성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고통과 비인간성을 직시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호메로스는 폭력을 인간 내면의 필연적 본성으로 그리되, 그것이 미화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담는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인 뒤, 그 시신을 질질 끌고 다니며 복수를 과시하는 장면은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다. 나중에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되찾으러 온 뒤, 아킬레우스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되찾는 장면은 폭력의 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결국 호메로스는 폭력이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감정이 어떻게 제어되고 전환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이는 단지 고대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쉽게 집단적 폭력으로 전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통찰이기도 하다. 호메로스의 ‘폭력’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 이해의 서사다.

연민: 파괴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다움

호메로스 서사에서 ‘연민’은 폭력과 분노가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다. 오히려 절망적인 순간일수록 연민은 더욱 빛을 발하며, 인간이 단순한 전사 이상의 존재임을 입증한다. 호메로스는 영웅 서사 안에 연민의 순간들을 교묘하게 삽입함으로써 감정의 균형을 이루고, 인간성을 재확인한다. 가장 대표적인 연민의 장면은 바로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무릎을 꿇는 장면이다. 아킬레우스는 방금까지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복수심을 과시하던 자였지만, 프리아모스의 간청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돌려준다. 이 장면은 전쟁이라는 잔혹한 틀 안에서도 연민이라는 감정이 폭력의 고리를 끊고, 인간적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또한 안드로마케와 헥토르의 작별 장면도 연민이 중심에 있다. 헥토르는 전장으로 나가야 함을 알지만, 어린 아들과 아내를 뒤로 두고 떠나는 장면은 영웅으로서의 의무와 인간으로서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아들이 자신을 무서워할까 헬멧을 벗고 웃음을 보이며, 그 짧은 순간 안에 수많은 정서가 응축된다. 이는 연민이 단지 나약함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인간 감정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디세이아』에서도 연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상황을 살피는 동안, 하인 에우마이오스가 보여주는 충성심과 연민, 그리고 나중에 펜elope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 등은 감정의 진정성이 중심이 된다.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전투와 유혹을 지나오면서도 인간적인 감정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귀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호메로스의 연민은 특정한 인물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심지어 신들조차도 인간을 향한 연민을 보인다.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돕고, 제우스조차 인간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전쟁에 개입한다. 이는 연민이 감정의 선택지가 아니라, 존재의 기반임을 시사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감정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감정을 약점으로 본다. 냉철함, 합리성, 효율성이 미덕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연민은 비효율적이고 감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오히려 그런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며, 폭력과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임을 강조한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연민이 살아있다면, 인간은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결국 호메로스가 말하는 연민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감정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인간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실질적 장치다. 폭력의 서사 속에서 연민을 끄집어낸 호메로스의 시선은, 오늘날까지도 감정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충돌: 본능과 이성, 전사와 인간 사이에서

호메로스 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감정 구조는 바로 ‘충돌’이다. 폭력과 연민, 분노와 용서, 복수와 이해 같은 감정이 작품 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며, 그 사이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 충돌은 단지 사건의 긴장감 유지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이중성을 드러내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는 이러한 감정 충돌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그는 가장 뛰어난 전사지만, 동시에 가장 연약한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분노는 단지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가 무시당했다’는 인간적인 상처에서 기인한다. 그는 분노로 인해 전장에서 물러나지만,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다시 복수심으로 전장에 나선다. 그러나 복수 후에는 오히려 깊은 공허와 죄책감에 빠진다. 이러한 감정의 충돌은 단순한 심리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적 딜레마다. 그는 전사이기 때문에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호메로스는 이 두 정체성을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충돌하게 둔다. 그 결과 독자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진실성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오디세이아』에서도 오디세우스는 끊임없는 감정 충돌을 경험한다. 귀환이라는 목표 앞에서 유혹과 갈등, 분노와 이해, 기만과 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의 여정은 물리적 귀향이 아니라, 감정적 성숙의 과정이다. 그는 강한 전사이자 지혜로운 왕이며,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편이고 아버지다. 이러한 다중 정체성은 각 상황에서 다른 감정을 요구하며, 그 감정들은 늘 충돌한다. 감정의 충돌은 전사와 인간의 충돌이기도 하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방어를 책임진 장군이지만, 동시에 어린 아들의 아버지이며, 아내 안드로마케의 남편이다. 그는 전장에 나가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와 가족을 지키고 싶은 ‘개인적 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감정의 충돌은 그를 더 인간답게 만들며, 그의 죽음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감정적 비극으로 승화된다. 호메로스의 서사에서 감정 충돌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충돌 자체가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인간은 늘 그 중간 지점에서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수많은 갈등—가족과 일 사이, 정의와 효율 사이, 사랑과 자존심 사이의 충돌—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호메로스는 감정이 충돌하는 그 순간에 인간이 진짜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폭력과 연민 사이의 충돌은 단지 전쟁 이야기 속의 갈등이 아니라, 인간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따를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그 고민 자체가 삶이며, 그 충돌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점이라고 말해준다.

호메로스는 고대의 전쟁 서사 속에 인간 감정의 복잡한 구조를 심어놓았다. 폭력과 연민, 그리고 그 사이의 충돌은 단지 극적 긴장감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 감정 구조는 우리가 어떤 감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인간은 감정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감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인간다움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