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와 서사시 『일리아스』에는 전쟁의 배경과 결과 속에 놓인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헬렌과 브리세이스는 트로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과 도구로 각각 기능하며,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서 자신들의 삶과 목소리를 잃어버린 비극적 인물들입니다. 이 글에서는 헬렌과 브리세이스라는 두 여성 캐릭터의 운명을 비교하고, 그들이 어떻게 전쟁과 영웅주의 서사 속에서 이용되었으며,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헬렌: 전쟁의 이유가 되어버린 아름다움의 상징
헬렌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지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함께 도망쳐 트로이로 향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고, 수많은 전사와 민족의 희생을 가져오게 됩니다. 헬렌은 종종 “트로이의 얼굴”이라 불릴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으로 서술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단순히 남성들의 욕망과 명예 싸움의 원인으로 그려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일리아스』에서 헬렌은 자신이 초래한 비극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를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는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파리스에게 끌려간 피해자인가, 혹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연인인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전쟁의 상징적 매개체로 이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헬렌은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무기이자 재앙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녀의 삶은 자유의지가 아닌 타인의 판단과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녀의 존재 자체가 왕국과 제국의 운명을 바꾸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녀는 전쟁의 이유가 되었지만, 그 전쟁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깊은 비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브리세이스: 영웅들의 분쟁 속에 소비된 여성
브리세이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사이의 갈등의 중심에 놓인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본래 트로이 동맹 도시의 귀족 출신 여인으로, 도시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으로 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자신의 노예를 빼앗기자 화가 나서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아가며, 이 사건이 아킬레우스의 전투 거부로 이어지고, 결국 여러 전투의 전세가 바뀌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브리세이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성들의 명예 싸움과 권력 투쟁 속에서 이용됩니다. 그녀의 몸은 전리품이자 권력의 상징으로 취급되며, 어떤 의견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세밀히 읽어보면,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를 사랑했으며, 그녀 나름대로의 감정과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브리세이스의 운명은 전형적인 전쟁 피해 여성의 서사 구조를 반영합니다. 그녀는 전쟁이 일으킨 파괴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며,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타인의 감정과 갈등을 부각하는 서사 장치로 이용됩니다. 그녀는 강제로 이주당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으며, 모든 권력을 상실한 채 남성 영웅들의 선택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구조 안에 갇혀 있습니다.
헬렌과 브리세이스 비교: 선택과 비선택 사이에서
헬렌과 브리세이스는 겉보기에는 유사한 위치에 있습니다. 둘 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 또는 계기로 작용하며, 남성 영웅들의 욕망과 명예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두 여성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율성의 정도’입니다. 헬렌은 어느 정도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파리스와 함께 도망쳤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브리세이스는 철저하게 타율적인 운명을 강요당한 인물입니다. 헬렌은 여전히 왕족의 지위를 유지하고, 전쟁 속에서도 왕족으로 대우받는 반면, 브리세이스는 전리품이자 노예로서 완전히 하위 계급으로 전락합니다. 이는 여성 캐릭터 내부의 계급적 구조를 보여주며, 신화 속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운명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헬렌은 자신의 아름다움이라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대화 속에서 자조적 표현도 할 수 있는 반면, 브리세이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말할 기회조차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사 속 ‘보이는 여성’과 ‘보이지 않는 여성’의 차이를 상징하며, 남성 중심의 문학에서 여성의 존재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 억압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결국 두 인물 모두 ‘선택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으며, 각각의 방식으로 이용당한 비극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브리세이스는 소유의 대상이었고, 헬렌은 상징의 대상이었으며, 그들 모두 인간으로서가 아닌, 남성 서사의 도구로 기능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헬렌과 브리세이스는 고대 서사 속에서 남성 영웅들의 갈등과 전쟁을 뒷받침하는 장치로 활용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한 여성의 고통과 비극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삶은 타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들이 겪은 상처와 상실은 명예와 승리를 추구하는 영웅들의 뒤편에서 묵묵히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이 여성들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자신만의 삶과 감정을 지닌 주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고대 신화를 다시 읽는다면, 반드시 그 중심에 여성의 목소리도 함께 놓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