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속 헥토르는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갈등 — ‘운명’과 ‘자유의지’ — 사이에서 고뇌하는 복합적 인물입니다. 트로이의 왕자이자 장군으로서 그는 신과 공동체,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선택의 딜레마와도 맞닿아 있는 헥토르의 선택을 통해, 고대 서사가 던지는 인간적 질문을 다시 성찰해 봅니다.
운명의 굴레 속 헥토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운명’은 절대적 개념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들의 뜻과 우주적 질서에 따라 살아야 했으며, 이를 거스르는 것은 곧 파멸로 이어졌습니다. 『일리아드』에서 헥토르는 바로 이러한 운명의 굴레 안에서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트로이의 왕자로서, 도시의 수호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사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싸워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헥토르가 보여주는 운명론적 태도는 작품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며, 아킬레우스와의 결투에서 승산이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그는 싸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아내 안드로마케와 작별하는 장면은 고대 문학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히며, 헥토르는 “내 운명이라면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가 개인적 감정보다 공동체적 책임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헥토르는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왔고, 그로 인해 트로이는 그리스 연합군의 침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스는 무책임하고 전투를 기피하는 반면, 헥토르는 전면에 나서 도시를 지키려 합니다. 그는 타인의 실수를 대신 책임지는 존재이며, 이는 고대 사회에서 요구했던 ‘영웅적 헌신’의 대표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는 자기 결정권 없이 타인의 운명을 짊어진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운명에 대한 순응이 반드시 비겁하거나 무기력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헥토르의 선택은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비극적 인식을 수반한 능동적 수용에 가깝습니다. 그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서 헥토르의 ‘운명론’은 단지 신화적 숙명론을 넘어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메시지로 확장됩니다. 그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인간이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비극적 존엄’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유의지와 결단의 흔적들
그렇다면 헥토르는 진정 자유의지가 없었을까요? 고대 서사시 속 인물들은 종종 운명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묘사되지만, 헥토르에게는 명확한 ‘결단의 순간’이 존재합니다. 그는 도망칠 수도 있었고, 항복할 수도 있었으며, 가족과 함께 도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기로, 싸우기로, 죽기로 결정합니다. 바로 이 ‘선택’의 행위가 자유의지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특히 중요한 장면은 헥토르가 성벽 앞에서 아킬레우스를 마주하기 전, 일시적으로 도망치는 장면입니다. 그는 세 바퀴를 성곽 주위를 돌며 달아나지만, 결국 멈추고 맞섭니다. 이는 본능과 의지, 두 감정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며, 헥토르가 단지 신의 명령에 따른 존재가 아니라, 두려움과 용기를 모두 품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공포를 느끼지만, 그 공포를 넘어서는 결단을 내립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자유의지는 종종 ‘비극적 선택’으로 드러납니다. 즉,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비극이라는 구조입니다. 헥토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싸우든 도망치든, 결과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헥토르는 단지 신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다운 고뇌를 통해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존재로 재해석됩니다. 또한 헥토르는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통합하는 선택을 합니다. 그는 단순히 전사로서만이 아니라, 트로이의 장군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행동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도시와 가족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면서도, 그 무게를 감수합니다. 이는 고대 사회의 ‘책임 윤리’와도 맞닿아 있으며, 헥토르의 자유의지는 단순한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적 책임에 기반한 자율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헥토르는 고대 서사 속에서 보기 드문 ‘인간다운 영웅’입니다. 그는 전지전능한 존재도, 절대적 악도 아닙니다. 그는 흔들리고, 고뇌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자유의지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 오히려 더 깊은 인간성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완벽한 선택을 기대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선택 속 진정성’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헥토르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인간상입니다.
트로이라는 무대, 공동체라는 틀
헥토르의 모든 선택은 결국 ‘트로이’라는 공간, ‘공동체’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일부이며, 그의 자유나 운명 모두 공동체적 기대와 압력에 의해 제약됩니다. 트로이는 단순한 도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화, 가족, 혈통, 신화, 역사, 정체성의 총합입니다. 헥토르는 이 모든 것을 짊어진 채 싸우고 죽는 인물입니다. 트로이는 일종의 ‘무대’입니다. 이 무대 위에서 모든 인물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헥토르에게 주어진 역할은 ‘최후의 수호자’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트로이의 문을 지키며, 도시의 명예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역할은 너무 무겁고, 구조적으로 패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신들의 축복을 받았다면, 헥토르는 인간적 한계를 안고 싸우는 존재입니다. 그는 트로이라는 집단의 몰락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공동체는 헥토르에게 책임을 요구하지만, 그 책임은 과도할 정도로 가혹합니다. 그는 파리스의 실수를 대신해 싸우고, 왕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는 헥토르의 죽음을 막지 못하며, 오히려 그를 소모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대적 공동체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은 집단을 위해 존재하며, 그 안에서 자율성은 제한됩니다. 트로이는 헥토르의 무대이자 감옥입니다. 하지만 이 공동체적 맥락이 헥토르를 더욱 빛나게도 합니다. 그는 단지 전사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타락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야망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옳은 일’을 하려 했고, 그 옳음은 단순한 법이나 명령이 아닌, 윤리적 직관과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트로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헥토르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의 결단으로 축소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집단을 대표함으로써, 더 큰 인간상으로 남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합니다. 가족, 직장, 사회, 국가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고, 또 얼마나 제약되어 있는가? 헥토르의 선택은 이 오래된 질문에 다시 불을 지피며,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의 방향과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듭니다.
헥토르의 삶과 죽음은 단지 신화적 서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운명과 자유의지’, ‘개인과 공동체’, ‘죽음과 존엄’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했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결단 앞에 서 있나요? 헥토르처럼, 진심으로 선택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