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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전설과 오디세이아: 배에서 내릴 수 없는 삶

by 집주인언니 2025. 9. 24.

피아니스트의 전설과 오디세이아 배에서 내릴 수 없는 삶 관련 사진

이탈리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단순한 음악영화를 넘어선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배 위에서 태어나 배를 떠나지 못한 한 피아니스트의 삶은, 고전 서사 오디세이아와 맞닿아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 영화의 신화적 구조를 중심으로, 왜 그는 배에서 내리지 않았으며, 그것이 우리 삶에 던지는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탐구해 봅니다.

배 위에 남은 존재, 신화의 반복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은 한 아이가 대서양 여객선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 배 안에서만 살다 죽는 이야기입니다. 1900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한 번도 육지에 발을 디디지 않고도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결국 배가 폐선될 때 함께 사라지기를 선택합니다. 이 구조는 단순히 비현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장치가 아닙니다. 이는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명확하게 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며, 오히려 반전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 위를 방랑했지만, 1900은 애초에 '세상'이라고 불리는 육지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스스로의 우주(배) 안에 머물렀습니다. 고전 영웅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귀환’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정체성을 되찾고, 영웅으로서 완성됩니다. 그러나 1900에게 귀환은 없습니다. 그는 고향이 없으며, 그의 정체성은 ‘배’라는 경계 위에서만 존재합니다. 이 배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닌, 세상과 자신 사이의 물리적·존재론적 장벽입니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1900은 새로운 형태의 영웅입니다. 그는 바깥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 밖에 남아 있음으로써 자아를 지켜냅니다. 그는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규범과 충돌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자유롭습니다. 이는 실존주의적 해석과도 연결됩니다.

경계에 머문 자, 실존의 상징

1900의 삶은 끊임없는 경계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다 위’라는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결정과 유예 사이’라는 정신적 공간에 머뭅니다. 이는 현대 실존 철학에서 말하는 ‘부동의 실존’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자신이 되기를 미뤄둔 존재”라 정의했는데, 1900은 이 정의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고 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엔 ‘선택하지 않음’을 택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결한 자기보존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는 수많은 세계를 피아노 건반 위에서 그려낼 수 있지만, 그 세계를 현실 속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습니다. 이 아이러니는 오디세우스가 겪은 고난과는 또 다른 종류의 비극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너무 많은 선택과 유혹 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1900은 그 시작조차 거부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정말 선택해야만 존재하는가?” 1900은 선택의 외부에서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그가 보지 못한, 그러나 마음속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나옵니다. 그는 실존의 정점이 아니라, 실존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자입니다.

오디세이아의 반영, 현대인의 자화상

오디세우스가 귀향을 위해 온갖 시련을 겪는 동안, 1900은 스스로의 항구(배)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 구조는 현대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이동과 변화가 자유롭지만, 정서적으로는 끊임없이 불안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태는 오디세우스보다는 오히려 1900에 더 가깝습니다. 배는 하나의 세계이며, 동시에 감옥입니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자유롭지만, 선실 밖 세상은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입니다. 이 역시 고전신화의 주제를 반영합니다. 신화적 영웅은 언제나 질서의 세계에서 혼돈의 세계로 진입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러나 1900은 혼돈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 결정은 단지 회피가 아닌, 주체적 포기입니다. 그는 '삶'이라는 무대에 올라가지 않음으로써, 고독한 예술가로 남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이야기가 강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점점 더 1900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SNS라는 배 위에 머물며 진짜 삶의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는 우리, 변화의 두려움 앞에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사람들, 익명성과 정체성 사이를 유예하며 존재를 연기하는 개인들. 이 모두는 1900의 이야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봅니다. 따라서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단순한 한 남자의 전기적 이야기나 판타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이자, 우리 시대의 존재론적 자화상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오디세이아는 겉으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선택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한가?” 이 질문들에 대해 1900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머무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배에서 내리는 삶’을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왜 아직 배 위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리지 않는 선택도 하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