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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와 시시포스: 반복의 철학

by 집주인언니 2025. 9. 23.

페넬로페와 시시포스 반복의 철학 관련 사진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두 인물, 페넬로페와 시시포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복'이라는 개념을 상징합니다. 하나는 사랑과 기다림 속에서 매일 밤 직조물을 풀며 시간을 버는 인내의 반복을 실천했고, 다른 하나는 신의 형벌로서 영원히 돌을 언덕 위로 굴리는 끝없는 반복을 살아갑니다. 이들의 반복은 단순한 신화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철학적 본질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읽힙니다. 본 글에서는 페넬로페와 시시포스의 반복 행위를 비교 분석하고,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 삶 속 반복되는 일,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 성과 없는 루틴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던져줄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페넬로페의 반복: 사랑, 전략, 그리고 조용한 저항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고대 서사시이자 인간의 삶과 본성에 대한 심오한 탐구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오디세우스는 모험과 전쟁, 수많은 신과 괴물을 만나는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그의 아내, 페넬로페입니다. 오디세우스가 10년간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고, 다시 10년간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겪는 동안, 페넬로페는 이타카에서 홀로 남아 수많은 구혼자들의 청혼을 거절하며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녀는 재혼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계략을 씁니다. “남편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장인의 수의(壽衣)를 다 짜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말합니다. 낮에는 열심히 베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몰래 풀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식으로 그녀는 3년이라는 시간을 버팁니다. 이 반복적 행위는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닙니다. 이는 페넬로페가 자신의 주체성과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었고, 특히 왕비의 위치는 더욱 정치적 억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그녀는 여성적 노동, 즉 베짜기라는 전통적 작업을 무기로 삼아, 구혼자들의 강압적 요구에 맞서 싸운 것입니다. 그녀의 반복은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전략입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녀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입니다. ‘결과’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의 반복은 시시포스와도 유사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시간을 조정하고 있으며, 이 행위를 통해 사랑과 충절,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페넬로페는 반복을 통해 시간을 통제하는 인물입니다. 남성들은 전쟁과 모험을 통해 이름을 남기지만, 페넬로페는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존재감을 유지합니다. 그녀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을 지배했습니다. 이는 반복 속에서도 창조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시포스의 반복: 부조리, 형벌, 그리고 수용

시시포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오만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로 묘사됩니다. 그는 인간과 신을 속이고 죽음을 두 번이나 피한 죄로 인해, 신들로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바로 거대한 돌을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것인데, 그 돌은 꼭대기에 닿기 직전에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이 과정을 끝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상황을 비추는 우화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이 인물을 부조리 철학의 핵심 상징으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성과를 내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은 그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 추구’와 ‘세계의 침묵’ 사이의 간극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시시포스는 그 부조리의 한복판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절대 끝날 수 없는 반복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카뮈는 말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고도 그 반복을 수용하는 순간, 그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즉, 시시포스는 단순히 고통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도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루틴을 반복합니다. 출근, 업무, 식사, 대인관계, 집안일. 이 모든 것들은 결과 없이 돌아오고, 다시 반복됩니다. 하지만 이 반복이 무의미한가요? 아니면 우리가 그 반복 속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시시포스는 비록 자신의 조건을 바꿀 수 없지만, 그 조건에 대한 태도는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는 반복의 노예가 아닌 의식 있는 수용자가 됩니다. 반복 자체가 바뀌지 않더라도, 그 반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곧 인간의 자유라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반복의 두 얼굴: 창조와 수용 사이에서

페넬로페와 시시포스의 반복은 구조적으로는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둘 다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복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 또는 반복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페넬로페의 반복은 전략적 반복입니다. 그녀는 매일 밤 베를 푸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려 했고, 현실을 조정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반복은 끝나지 않지만, ‘종료될 수 있는 반복’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는 반복 속에서도 미래를 지향합니다. 반면 시시포스는 형벌적 반복 속에 있습니다. 그의 반복은 영원히 끝나지 않으며, 어떤 성과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포기’가 아닌 ‘수용’을 선택합니다. 그의 반복은 외부 조건이 아닌 내면의 태도 변화를 통해 의미화됩니다. 이 둘을 대비해보면, 우리는 인간 존재가 반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창조적인 반복이며, 다른 하나는 수용적인 반복입니다. 페넬로페는 반복을 통해 삶을 다시 짜고, 미래를 유예시키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반면 시시포스는 변화 없는 현실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는 양쪽 모두의 반복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하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며, 동시에 변화하지 않는 조건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합니다. 직장생활, 육아, 인간관계, 공부 등 우리 삶 곳곳에는 ‘끝나지 않는 일’이 존재합니다. 이런 반복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페넬로페처럼 전략을 세워야 하고, 때로는 시시포스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반복이 무의미하다는 전제를 버리는 것입니다. 반복은 삶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인간성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책임이든, 생존이든, 반복은 삶의 본질이며, 그 반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곧 우리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결론

페넬로페와 시시포스. 두 고대 인물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반복을 수행했지만, 모두 오늘날 우리 삶 속에 깊은 통찰을 던져줍니다. 페넬로페는 사랑과 희망, 전략을 통해 반복을 창조적인 행위로 만들었고, 시시포스는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반복 속에서도 존재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이 둘의 철학을 통해, 반복을 단순한 피로가 아닌, 삶을 구성하는 힘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면, 그 반복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결과를 위한 반복인가요, 아니면 존재 자체를 위한 반복인가요? 그 어떤 것이든, 그 반복은 당신만의 서사와 철학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한 줄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