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북서부,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에 위치한 이사르릭 언덕.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닙니다. 전설과 역사, 고대와 근현대가 겹쳐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고고학적 장소 중 하나인 트로이 유적지입니다. 수천 년에 걸쳐 열 번 이상 중첩된 도시 문명은 단일 국가의 흥망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흐름과 상호작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트로이 유적의 각 도시층을 시대별로 분석하고, 각 층이 가지는 건축적, 사회문화적, 고고학적 의미를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트로이 I~III: 초기 청동기 시대의 개척기와 도시화의 시작
트로이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층은 트로이 I로, 기원전 약 3000년 무렵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해당합니다. 트로이 I층은 원형 요새 형태의 작은 취락으로,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석조와 흙벽으로 된 거주지는 작은 방들이 모여있는 형태였으며, 당시 사회는 부족 중심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 도시층에서는 기본적인 생활도구와 토기류, 간단한 장신구 등이 발굴되었으며, 교역보다는 자급자족을 중심으로 한 생활 방식이 주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트로이 II층은 초기 청동기 시대의 발전된 도시 형태를 보여줍니다.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이 층에서 발굴한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이 도시층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슐리만의 발굴 방식은 과격하고 파괴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그의 발굴 방식과 결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트로이 II층의 건축은 보다 정돈된 형태를 띠며, 도시 중심부에는 대형 구조물이나 공공 건축물이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도시층에서는 사회 계층의 분화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무덤 유물도 확인됩니다. 트로이 III층은 약간의 쇠퇴기를 거친 뒤의 회복기로 평가됩니다. 이 시기의 도시는 이전보다 소형화되었지만, 도시 계획과 건축 양식이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특징입니다. 방어벽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 시기에도 불에 의한 파괴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는 당시 해상 교역과 지중해 지역의 갈등 양상이 트로이까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 세 개의 초기 도시층은 트로이가 단순히 신화 속 도시가 아니라, 실질적인 고대 도시로 성장해 가는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들이 남긴 건축 방식, 도구, 주거 양식은 이후 고대 도시 형성의 원형이 되었으며, 트로이 유적 전체의 문화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트로이 IV~VI: 번영의 시대와 트로이 전쟁의 배경
기원전 2200년경부터 약 1000여 년간 이어지는 트로이 IV~VI층은 트로이 도시문명의 전성기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기는 인근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성장하고, 에게해 및 소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던 시기로, 트로이 역시 해상 무역과 내륙 경로를 통한 중계 무역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트로이 IV층에서는 기존보다 더욱 발전된 석조건축 기술이 도입됩니다. 방어벽은 이전보다 높고 두꺼워졌으며, 일부 구간에는 방어용 타워나 문루가 설치되어 도시 방어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또한 이 시기의 주거지는 명확하게 사회 계층에 따라 구획된 것으로 보이며, 중심부에는 권력자가 거주하거나 의식을 행했던 공간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트로이 V층은 비교적 안정된 도시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건축 양식에서 지역성과 국제성이 혼합되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미케네 양식의 장식품이 발견되기도 하고, 아나톨리아 전통의 흙벽돌 건축이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시기는 트로이 도시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트로이 VI층은 트로이 유적의 핵심이자,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층입니다. 이 시기의 도시는 직경 200~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입구는 거대한 석재 문으로 통제되었습니다. 도시 내부에는 다양한 크기의 건물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광장이나 회의 장소로 추정되는 공간도 존재했습니다. 특히 도로와 배수시설 등 기반시설이 발달해 있었고, 지역 내 위생관리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트로이 전쟁의 실제 무대로 거론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고고학자들은 트로이 VI층에서 발견된 고급 유물과 거대한 석조 건축을 근거로 이 도시가 당대 해상 무역의 요충지였으며, 그로 인해 인근 세력들과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또한 트로이 VI층 말기에는 강력한 지진 혹은 침입으로 인한 파괴 흔적이 확인되며, 이는 고대 기록과도 일정 부분 일치합니다. 이 층의 유물들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이는 당시 트로이가 그리스 본토와 빈번한 접촉을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미케네식 도자기, 금속 장신구, 무기류 등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청동 무기와 철제 무기의 병용은 전쟁 준비의 흔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트로이 VI층은 트로이 문명의 절정기이자,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고대 도시가 어떻게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또 외부 요인에 의해 어떻게 멸망할 수 있는지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로이 VII~X: 쇠퇴와 재건, 기억의 유산
트로이 VIIa층은 트로이 VI층의 붕괴 이후 형성된 도시로, 기원전 1250년부터 1180년경까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는 많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실제 트로이 전쟁의 시대적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그 근거는 바로 전쟁의 흔적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물들에 있습니다. 트로이 VIIa층에서는 급하게 보강된 방어벽, 비상식량 저장소, 화재로 파괴된 건물, 투창용 무기, 그리고 시민들이 피신했던 것으로 보이는 지하 저장고 등이 발견됩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도시가 방어에 집중했음을 보여주며, 트로이 전쟁이라는 고대 서사시가 단순한 신화가 아닌, 일정 부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트로이 VIIb층부터는 도시의 성격이 완전히 바뀝니다. 대규모 건축은 줄어들고, 주거지는 소규모이며, 도자기나 장신구 등 유물의 예술성도 이전에 비해 떨어지게 됩니다. 이는 도시의 재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정치적·경제적 역량이 축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시기의 유물은 이전과 다른 북방계 도자기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며, 인구 구성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형성된 트로이 VIII층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시기입니다. 트로이는 더 이상 도시 국가로 기능하지 않으며, 신화적 유산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변화합니다. 이 시기에는 아폴론 신전, 극장, 체육장 등이 들어섰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된 장소로서의 트로이에 대한 숭배가 형성됩니다. 트로이 IX층은 로마 제국 시기, 특히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크게 번성합니다. 로마 황제들은 트로이를 ‘영웅의 도시’로 여겨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트로이 후손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제스처로 트로이를 방문하거나 비문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의 트로이는 일종의 ‘성지’로 기능하며, 학자, 시인, 군인, 종교인 등이 방문하는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마지막 층인 트로이 X층은 중세 초기에 해당하며, 트로이가 점차 잊히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시기의 유물은 소수에 불과하며, 일부 건축 잔해와 도자기 파편이 남아있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트로이는 방치되었고, 19세기 들어서야 고고학적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트로이의 마지막 도시층들은 실질적인 정치·경제 도시의 기능보다는,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전쟁의 흔적이 기억되고, 그것이 신화로 재탄생하며, 결국 하나의 문명이 예술과 종교, 문화로 승화되는 과정을 트로이 유적은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트로이 유적은 단순한 고대 도시가 아닙니다. 10개 이상의 도시층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축적되었으며, 각 층은 자신만의 시대적 특성과 건축 양식, 사회구조, 경제활동, 외부와의 교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트로이 VI~VIIa층은 고대 서사시의 배경이자, 실제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고학적 결정체입니다. 이러한 트로이의 다층적 구조는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자,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트로이 유적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탐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