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 문학의 정수인 『일리아드』는 인간과 신의 갈등, 전쟁과 명예, 운명과 자유의지 등을 중심으로 한 서사시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신들의 개입입니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으며 수없이 등장하는 신들의 행동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능한 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일리아드』 속 신들은 때로는 강력하고, 때로는 유치하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감정적입니다. 이 글에서는 ‘전능한 신’과 ‘감정적 신’이라는 두 개념의 교차점에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그 신 개념이 고대 그리스 사회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합니다.
일리아드의 신: 절대자 아닌 감정적 존재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제우스, 아테나,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 각 신들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인간의 운명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지전능’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먼저, 신들은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아킬레우스가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고 격분할 때, 그의 어머니이자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슬픔에 빠지고, 아들에게 무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다른 신들을 설득하러 갑니다. 이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한, 아테나는 그리스 군을 돕고자 수시로 개입하며, 트로이 편에 선 신들과 경쟁하듯 행동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신들이 전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제우스는 모든 신의 왕이지만, 그 역시 무력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는 자식인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고 싶어 하지만, 모이라(운명)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슬퍼하며 죽음을 허락합니다. 이는 ‘운명’이라는 더 큰 질서가 신 위에 존재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신들은 결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일정한 규칙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전능한 신 개념과의 차이: 유일신 사상과의 비교
우리가 익숙한 ‘전능한 신’ 개념은 주로 유일신 사상, 특히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신 개념에서 등장합니다. 이 신은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하며, 우주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절대자입니다. 반면,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다신론적 구조 속에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인간과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리아드』의 신들은 실수하며, 화를 내며,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서 행동합니다. 제우스조차 헤라에게 속거나, 딸 아테나와 의견 충돌을 겪습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처럼 질투하고 사랑하며 복수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전능’이라는 개념보다는 ‘확장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감정과 특질이 극대화된 존재가 곧 그리스의 신들이었습니다. 또한, 신들의 능력은 한정적입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지만, 항상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합니다. 앞서 언급한 사르페돈의 죽음이나 헥토르의 최후는 제우스가 간섭하고 싶어도 운명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끼는 장면들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 그리스 세계관에서 ‘모이라’(운명)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신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신은 완전한 전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감정적 신이 주는 문학적 효과: 인간 중심의 서사
호메로스는 『일리아드』를 통해 감정적인 신들의 모습을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합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신들을 도구화함으로써 인간의 선택과 감정, 운명의 무게를 강조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감정적인 신이 인간과 다르지 않게 행동할 때, 독자는 오히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숭고한지를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장면에서, 신들은 그 행위를 막지 못하고 단지 지켜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신의 개입 없이도 얼마나 강력한 서사적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감정적인 신은 이야기에 유머와 긴장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 사이의 다툼이나 제우스의 질투는 마치 인간 사회의 갈등과 유사하게 전개됩니다. 이는 독자가 신을 이해 가능한 존재로 느끼게 하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 사회의 문제를 투영하는 장치를 제공합니다. 결국, 호메로스는 전능한 신이 아니라 감정적인 신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 중심의 문학을 완성합니다. 이로 인해 『일리아드』는 신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비극, 선택, 용기, 후회 등의 서사를 가장 정교하게 그려낸 작품이 됩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 개념이 남긴 철학적 함의
고대 그리스의 신은 전능한 신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 유사한 권력 구조를 가진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제우스는 왕이지만 독재자가 아니며, 신들 간의 회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거나, 때로는 다른 신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이는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정치적 상상력이 반영된 구조입니다. 이러한 다신론적 세계관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 신은 호메로스식 신처럼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들이 신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을 비판하며, 보다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신 개념을 요구합니다. 이는 후대의 종교사상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넘어가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호메로스의 감정적 신들은 인간 사회를 이해하고 묘사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은유로 작동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독자들은 신들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투영하고, 신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그들이 사랑한 인간을 통해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신은 완전하고 전능하다’는 전제를 가진 신 개념에 익숙하지만, 『일리아드』가 제시하는 신의 개념은 훨씬 인간적이고, 친근하며, 때로는 문제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호메로스 문학이 오랜 세월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감정적 신은 인간 서사의 확장판이며, 인간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결론: 전능한 신과 감정적 신의 교차점에서 본 일리아드
『일리아드』의 신들은 강력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절대적 존재이기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 세계관의 핵심을 반영하며, 당시 인간과 세계, 운명과 도덕에 대한 이해 수준을 문학적으로 구현합니다. 전능한 신 개념은 고대 후기, 유대-기독교 사상과 함께 정립된 반면, 호메로스 시대의 신은 인간 사회를 확대해 놓은 또 다른 층위였습니다. 신들은 인간의 거울이자, 인간이 가지지 못한 힘을 지닌 존재이며, 동시에 인간처럼 실수하고 분노하고 사랑합니다. 이러한 신은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완벽하지 않은 존재 속에서 완벽한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따라서 『일리아드』는 전능한 신과 감정적 신 사이의 교차점에서 문학과 철학, 신화와 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제시합니다. 이는 단순히 신화 속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