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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 영광인가 파멸인가? (전쟁, 비극, 명예)

by 집주인언니 2025. 9. 8.

일리아드, 영광인가 파멸인가 (전쟁, 비극, 명예) 관련 사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정수를 담은 문학작품으로, 단순한 영웅 서사를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의 모순까지 들춰내는 깊이 있는 고전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그 이면에는 권력, 분노, 명예, 복수, 상실이라는 인간사의 근본적인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전쟁은 과연 영광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파멸로 향하는 비극일까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사회를 성찰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정당성, 그 허상 (전쟁)

『일리아드』는 단순히 고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신화적 서사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전쟁의 원인은 신화적으로는 ‘헬레네의 납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남성 중심 권력 구조와 명예 체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빼앗음으로써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서사는 단지 사적인 감정의 충돌이 국가 전체의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 세계에서 전쟁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이유로 일어났는지를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권력욕과 명예욕이 집단적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전투를 거부하고, 이로 인해 그리스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결국 이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부터 끝까지 ‘정당성’이라는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국제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호메로스는 작품 내내 전쟁의 폭력성과 무의미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죽음은 빠르고 잔혹하며, 이름도 모를 수많은 전사들이 전장에 쓰러지지만, 그들의 희생은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몇몇 영웅들의 명예만이 서사에 남을 뿐입니다. 전쟁은 소수의 명예를 위해 다수의 생명을 소비하는 구조이며, 이는 오늘날의 전쟁과 권력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또한, 호메로스는 신들의 개입을 통해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강조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신들의 장난과 감정싸움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는 고대인의 운명관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쟁이라는 집단 행위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통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쟁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전쟁은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정치적 명분 아래 벌어지지만, 실제 피해는 일반 시민에게 집중됩니다. 『일리아드』는 이러한 점을 이미 2,800년 전 작품에서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으며, 전쟁이란 명분이 아닌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본질을 파헤칩니다. 작품 속 그리스 군과 트로이군 모두 피해자이며, 이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를 통해 전쟁이 가져다주는 '영광'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찬란한 영웅, 그러나 외로운 죽음 (비극)

『일리아드』의 중심 인물인 아킬레우스는 무적의 전사이자 전쟁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명예와 분노, 고독과 상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영광을 위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 헥토르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의 시신을 능욕하는 비인간적 행위까지 저지릅니다. 이 모습은 과연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요? 호메로스는 의도적으로 아킬레우스의 이중적인 면모를 강조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이지만, 동시에 가장 약한 내면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분노는 명예욕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그 감정은 친구를 잃은 슬픔과 고립감으로 변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내면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이 비극적 인물상은 오늘날에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외형적으로 강한 이들이 내면적으로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헥토르 역시 찬란한 전사로 묘사되지만,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욱 강조됩니다. 그는 자신의 도시와 가족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지만, 결국 아킬레우스에게 무력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헥토르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트로이라는 도시의 몰락과 그 문화 전체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그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참혹함과 영웅의 무력함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일리아드』는 이처럼 영웅 서사의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면서도,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영웅들의 찬란한 순간은 곧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이 얻는 명예는 결국 파괴와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점을 통해 고대 사회의 영웅주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합니다. 그는 영웅이란, 단지 강한 자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품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영웅’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만, 진정한 영웅이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치적 영웅, 기업의 리더, 사회 운동가 등 다양한 형태의 영웅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한계와 실수를 지닌 인간입니다. 『일리아드』는 그런 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숭배하는 영웅상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전쟁과 영광의 대서사 속에서도, 결국 인간은 외롭고 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게 합니다.

명예란 무엇인가 (명예)

『일리아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인 가치는 바로 '명예'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명예는 곧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전사 계급에게 있어 명예는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사건을 단순한 사랑의 상실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판단해 전투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의 분노는 곧 명예의 손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기점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명예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통해 성립되는 가치입니다. 즉,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통해 ‘명예롭다’는 지위가 부여됩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무용담이 후세에 노래되고 기록되기를 원했으며, 이는 그에게 명예 이상의 불멸성을 부여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명예를 얻는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명예는 영광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닙니다. 『일리아드』는 명예의 허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이 왜 그토록 명예를 추구하는지를 심도 있게 탐색합니다. 명예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인정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외부를 의식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잃고, 외형적인 성공이나 평가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명예는 ‘사회적 지위’, ‘브랜드’, ‘성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받으려 하고, SNS나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번아웃을 겪거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일리아드』는 이러한 현대적 명예 추구의 모습에도 통찰을 제공합니다. 명예를 좇는 행위가 때로는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진정한 명예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일리아드』는 단순한 전쟁 서사를 넘어 인간 본성의 깊은 층위를 탐색하는 고전입니다. 전쟁의 영광은 허상이며, 영웅의 삶은 외롭고, 명예는 파멸을 부르는 이중적 가치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집단의 모순을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일리아드』를 읽는 것은 과거를 통찰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성찰하는 지적인 행위입니다. 고전은 결코 낡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더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