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단순한 전쟁 서사시를 넘어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세밀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물들은 분노, 슬픔, 연민이라는 감정을 경험하며, 그 과정은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서사로 확장된다. 이 글에서는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준 세 가지 감정을 중심으로 그 의미와 현대적 시사점을 살펴본다.
분노: 영웅을 움직이는 원초적 감정
일리아드의 첫 구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분노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아가자 자신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느낀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전리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전사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이는 아킬레우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그의 분노는 단순한 화가 아니라 자존심과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는 본능적 반응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며 전장에서 물러난다. 그의 이 결정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집단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 군은 주력 전사가 빠진 상태에서 연패를 거듭하며 사기가 떨어지고, 트로이 군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개인의 감정이 전쟁이라는 집단적 사건의 향방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일리아드는 감정의 사회적 파급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분노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킬레우스는 분노 속에서 전쟁을 떠났다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분노를 불태우며 전장에 복귀한다. 그의 분노는 전투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고, 결국 헥토르와의 결전을 통해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켰다. 이는 분노가 단순히 파괴적 감정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창조적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분노는 억눌리면 내면을 갉아먹는 위험한 감정이지만, 적절하게 표출되면 자기 방어와 정체성 확립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명예를 지키려는 자기 방어였으며, 동시에 전쟁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지도자의 분노, 집단의 분노는 정치적 변화를 촉발하거나 사회적 개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곤 한다. 따라서 일리아드 속 분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 인간 감정으로 읽힌다.
슬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간의 고통
일리아드의 또 다른 중심 정서는 슬픔이다. 전쟁은 끊임없는 상실을 낳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의 눈물은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슬픔은 인간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깊은 감정으로, 작품 속 다양한 장면에서 강렬하게 묘사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 헥토르와 맞붙다 목숨을 잃는다. 아킬레우스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땅에 주저앉아 울부짖으며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스스로의 존재가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진다. 이 장면은 단순한 군사적 손실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인간의 내적 붕괴를 보여준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깊은 비탄에 잠기지만, 이 슬픔은 새로운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전장으로 나아간다. 이는 슬픔이 인간을 무력하게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결단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장면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장례 의식은 단순히 죽은 이를 기리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슬픔을 나누고 유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성대한 장례 경기를 열어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며, 이는 개인적 슬픔이 사회적 의례를 통해 공동체적 의미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헥토르의 죽음 또한 슬픔의 정점을 이룬다.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어린 아들을 안고 남편의 시신을 보며 절망하고, 어머니와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한없이 통곡한다. 이 장면은 적군의 비극조차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슬픔은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의 공통된 경험임을 드러낸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슬픔을 상실 반응으로 규정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변화를 경험한다고 본다. 아킬레우스가 슬픔을 통해 전장으로 돌아가고, 공동체가 장례 의식을 통해 결속하는 과정은 바로 이러한 심리학적 원리를 고대 서사 속에 담아낸 것이다.
연민: 적과 아군을 넘어선 인간성의 회복
일리아드의 마지막 장면은 분노와 슬픔을 넘어 연민으로 귀결된다.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적진으로 직접 들어와 아킬레우스에게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는 아킬레우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눈물로 호소하며, 너도 아버지가 있지 않느냐는 말로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킬레우스는 처음에는 적군의 왕을 냉정하게 바라보지만, 곧 프리아모스의 모습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 순간 그는 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서, 동일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인식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분노와 슬픔을 녹여내는 연민을 보여준다. 연민은 인간성 회복의 출발점이다. 분노와 슬픔이 인간을 분열시키고 파괴한다면, 연민은 그 틈을 메우고 공동체를 다시 연결한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은 인간이 극한의 적대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철학적으로도 연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을 인간이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며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일리아드의 결말에서 아킬레우스는 바로 이 감수성을 획득한다. 그는 신적인 힘을 가진 영웅이지만, 결국 인간적 감정 앞에서 변화하고 성숙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연민은 중요한 가치다. 분열과 갈등이 첨예한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사회적 화해와 공동체적 회복의 핵심 열쇠가 된다. 일리아드가 마지막을 연민으로 맺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서사적 선택이었다. 일리아드는 단순한 전쟁 기록이 아니라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탐구한 고전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인간이 존엄과 명예를 지키려는 본능을 보여주고,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의 죽음으로 드러난 슬픔은 상실과 애도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남에서 드러난 연민은 인간이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일리아드는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분노를 어떻게 다루고,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며, 연민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 고전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일리아드는 그 거울 속에서 인간 본성을 가장 깊이 탐구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