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의 대표 서사시 『일리아드』는 단순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신의 복잡한 관계, 영웅의 운명, 그리고 신의 개입으로 인해 일어나는 구원과 파멸의 서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인간의 전투를 관찰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개입하며, 특정 인물을 구하거나 파멸로 이끕니다. 이 글에서는 『일리아드』 속에서 인간을 구원한 신과 파멸시킨 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의 개입이 어떤 윤리적,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탐구합니다. 특히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폴론,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등 주요 신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서사를 해석하며, 신이 인간의 편인지 혹은 단지 신들의 권력 싸움의 도구로 인간이 존재하는지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인간을 구원한 신: 보호와 전략의 개입
『일리아드』에서 신들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명예를 보존하고 전쟁 속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인간을 돕는 신은 바로 아테나입니다.
아테나: 이성적 개입과 선택적 구원
아테나는 그리스 진영, 특히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전략가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여신입니다. 그녀는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며, 때로는 전투에 직접 개입하여 중요한 인물을 보호합니다. 예를 들어, 아테나는 디오메데스가 아레스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눈을 밝혀주고, 창의 방향을 정확히 유도합니다. 그녀는 또한 오디세우스에게 지략을 제공하고, 그리스의 전반적인 전쟁 전략에서 중심축 역할을 합니다. 아테나의 구원은 명확한 편 가르기를 동반합니다. 그녀는 그리스 진영을 선택하고, 트로이의 영웅들에게는 냉담합니다. 이로 인해 트로이 전사의 입장에서는 아테나는 구원의 신이 아니라 파멸의 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는 감정보다 전략에 따라 움직이며, 인간의 명예를 지키고 승리를 이끌기 위해 기민하게 판단합니다. 그녀는 단순한 감정적 편애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헤라와 포세이돈: 권력 균형 속의 구원
헤라 역시 그리스 진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신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트로이의 몰락을 원하며, 제우스를 속이면서까지 전쟁의 흐름을 그리스에게 유리하게 조작합니다. 포세이돈도 마찬가지로 그리스 군을 돕기 위해 전장에 직접 개입합니다. 특히 그리스 군이 밀릴 때, 포세이돈은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제우스의 눈을 피해 전장을 활보합니다. 이 두 신의 개입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권력 다툼 속의 구원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즉, 특정 인간을 도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이중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특히 그리스 진영 병사들은 실제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며, 이는 신의 구원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2. 인간을 파멸시킨 신: 감정, 복수, 편애
『일리아드』에서 많은 파멸은 신의 직접적인 분노나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신은 인간보다 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존재로 묘사되며, 그들의 분노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신은 아폴론과 아프로디테입니다.
아폴론: 전염병과 죽음을 가져온 신
『일리아드』의 서두에서 아폴론은 사제 크뤼세스의 모욕을 이유로 그리스 진영에 전염병을 퍼뜨립니다. 이는 전쟁 초기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건으로, 아폴론의 감정적 대응이 인간 세계에 가져온 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폴론은 헥토르의 편에 서서 그의 힘을 강화하고, 전투 중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서 헥토르가 죽지 않도록 전략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러나 결국 헥토르가 죽게 되는 순간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방조합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신이 인간을 일시적으로 보호하다가도 결국은 파멸로 내모는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아프로디테: 사랑이라는 명분 속의 파괴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보호하고, 그를 전투에서 반복적으로 구출합니다. 이는 전투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그리스 진영에는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그녀는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오는 계기를 만들고,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모든 개입은 사랑이라는 감정적 명분 아래 이루어지지만, 결과적으로 수천 명의 생명이 희생되는 전쟁을 부추긴 행위입니다. 아프로디테의 파멸은 ‘의도적 악의’라기보다는 무책임한 편애와 자기중심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녀는 사랑받는 존재에게 모든 혜택을 주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에는 무관심합니다. 이처럼 『일리아드』에서 신은 인간보다 더 비윤리적이며,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3. 제우스: 중립과 균형이라는 이름의 방관
제우스는 가장 강력한 신으로, 『일리아드』의 흐름 전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특정 순간에는 분명한 개입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테티스의 부탁으로 트로이 진영이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허락하고, 아킬레우스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전개를 유도합니다. 제우스의 개입은 인간을 직접 구하거나 죽이기보다는 상황을 만드는 데 집중됩니다. 그는 운명의 저울을 사용하여 전투의 흐름을 관찰하고, 때로는 한쪽의 몰락을 묵인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구원자도, 파괴자도 아닌 방관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더 큰 차원의 조율자이자, 파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존재입니다. 그의 ‘중립’은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는 신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면서도 인간 세계의 고통에는 비교적 무관심합니다. 따라서 제우스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신이며, 간접적으로 구원과 파멸을 모두 가능케 한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신의 개입은 구원인가, 파멸인가?
『일리아드』에서 신의 개입은 인간에게 축복이자 재앙입니다. 아테나, 헤라, 포세이돈은 그리스 진영을 보호하고 인간을 구원하려 하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아폴론, 아프로디테는 감정적 개입으로 인간 세계에 비극을 가져오며, 그 파괴력은 신의 전능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은 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항상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은 인간의 생사, 명예, 전쟁의 흐름을 결정하며, 구원과 파멸의 경계는 신의 기분과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를 통해 인간의 고귀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인간은 신의 비일관적 선택과 편애 속에서도 싸우고, 선택하며, 끝내 자신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일리아드』는 신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고, 또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통해 단순한 전쟁 서사에서 철학적 깊이를 더합니다. 구원의 신과 파멸의 신은 결국 하나의 동전 양면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답게 존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