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중심에는 신과 인간이 뒤섞인 세계관이 펼쳐집니다. 오늘날 종교나 문학에서 신은 절대적 존재, 또는 인간을 심판하고 규율하는 권능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일리아드』에서는 신이 반드시 그런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성향과 행동을 보이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이런 특징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독자에게 신이 과연 인간과 동등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본 글에서는 『일리아드』 속 신들의 감정, 행동, 윤리적 책임 등을 분석하여 신이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그려졌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일리아드 속 신의 감정 표현
『일리아드』에서 신들은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처럼 웃고, 울며, 분노하고, 질투합니다. 제우스는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편애로 인해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도 하고, 아테나는 인간 영웅 오디세우스를 지지하면서 그의 전투에 개입합니다. 이런 감정 표현은 고대 독자들에게 신이 무섭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인간보다도 더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프로디테의 행동입니다. 그녀는 파리스와 헬레네의 관계를 지지하고, 파리스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전장에 직접 뛰어들어 그를 구출합니다. 이는 전지전능한 신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사랑에 눈이 먼 인간 여성의 충동적인 행동에 가깝습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여신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상처 입고 올림포스로 도망치는 장면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수치심과 자존심을 드러냅니다. 제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전쟁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는 최고 신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들의 설득이나 간섭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테티스가 자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위하여 트로이 전쟁에서 아카이아인들이 고전하도록 요청하자, 그는 이에 동의하며 인간사의 갈등에 감정적으로 개입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관에서조차도 신이 인간의 감정과 이해관계를 벗어나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아폴론의 행동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트로이 측의 편에 서서 전염병을 퍼뜨리거나 직접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의 분노는 인간들의 불경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개인적인 감정이 우선하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묘사들은 고대 독자들에게 신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인식되게 만들며, 현대 독자에게는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끼게 합니다. 이렇듯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신들은 단지 상징적 존재가 아닌, 서사의 주체로서 인간 못지않은 감정과 사고를 지닌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로 인해 신은 단순히 인간을 지배하거나 이끄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 세계의 일부로서 상호작용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신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동등하거나 심지어 종속된 존재로 느껴지게 합니다.
신의 개입과 인간 자유의지의 경계
『일리아드』의 중심 갈등은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둘러싸고 인간과 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작품 내내 신들은 전쟁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 하지만, 이러한 개입이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선택과 병행되는 것인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주목할 부분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운명입니다. 이 두 인물은 각각 아카이아와 트로이의 대표 전사로, 그들의 선택과 행동이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신들에 의해 일정 부분 예견되고, 조율됩니다. 특히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짧지만 영광스러운 삶을 선택합니다. 이는 신의 결정이 아닌, 인간의 자율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 자체가 신의 개입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자유의지의 한계를 암시합니다. 신들은 단순히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기도 합니다. 아테나는 디오메데스를 통해 전투 전략을 조정하고, 헤라는 제우스 몰래 전쟁에 개입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이끌려합니다. 이처럼 신들이 인간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신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저항, 실수, 우연이 결합되어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아킬레우스가 전장에 나가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이는 신들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계획이 아닌, 인간의 감정과 상황이 결합되어 벌어진 일입니다. 물론 신들이 그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지만, 그 사건의 핵심은 인간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리아드』는 신의 권능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는 복합적인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일리아드』 속 세계는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과 인간이 동일한 서사 구조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선택하며, 실수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신의 개입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고, 인간의 의지 또한 제한되지만 무력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설정은 고대 문학에서 보기 드문 인간 중심적 관점을 보여주며, 신이 인간보다 높은 위계의 존재가 아니라 서사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기능함을 드러냅니다.
윤리적 판단에서 신은 면책될 수 있는가?
신의 행동이 인간과 유사하거나, 때로는 인간보다 더 감정적이라는 점은 단지 문학적 장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아드』는 단순한 서사시를 넘어 윤리적 질문도 던지고 있습니다. 신들이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그에 따른 책임과 윤리적 평가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서 신은 종종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의도적으로 전쟁을 연장시키는 등 비윤리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아폴론은 아카이아 진영에 전염병을 퍼뜨려 수많은 병사들이 죽도록 만들고, 제우스는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트로이 전쟁을 더욱 잔인하게 만드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런 행동들은 신의 권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도덕적 책임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현대 윤리학에서 책임의 전제는 자유의지와 인과관계입니다. 어떤 존재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행위를 하고, 그 행위가 특정 결과를 낳았다면, 그 존재는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리아드』 속 신들도 동일한 기준에서 판단받을 수 있을까요? 작품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지만, 독자는 신들의 행동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신을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기준 아래에 놓고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신의 도덕성이 간접적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에서, 아킬레우스는 신적인 연민과 인간적인 공감을 동시에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제우스가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며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는 장면은, 오히려 신이 인간 윤리를 따르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는 윤리적 기준이 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공동체 규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일리아드』에서 신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연 현상이나 운명을 상징하는 개념이 아니라, 욕망과 감정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서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그들의 결정은 인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과정에서 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목소리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은 더 이상 도덕적 면책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과 동일한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일리아드』 속 신을 절대자가 아닌, 인간적인 기준 속에서 판단하게 됩니다. 신은 실수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며,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체의 질서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이는 신을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결론적으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보다 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기보다는,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 윤리적 판단의 영역 속에 깊이 침윤된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인간처럼 실수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분노하며,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신과 인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두 존재가 서사 속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리아드』는 고대의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인간 중심적 시각과도 맞닿아 있으며, 신이 더 이상 절대적 통치자가 아님을 문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