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작품이며, 동시에 인간과 신의 관계, 전쟁과 귀향, 운명과 자유의지 등 다양한 철학적 주제를 다룬 서사시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영웅들의 이야기로 기억하지만, 서사 전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인간들의 싸움 너머로 복잡하고 냉혹한 ‘신의 정치’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신의 정치란 단지 신들 간의 감정적 갈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력, 영향력, 자기 이익, 복수심, 질투, 체면 등 현실 정치 못지않은 계산과 이해관계의 얽힘을 의미합니다. 『일리아드』에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원인도,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지연되는 이유도, 모두 인간의 문제가 아닌 ‘신의 권력다툼’의 결과였습니다. 본 글에서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관통하는 신들의 정치구조와 그 속에서 희생되는 인간의 운명을 분석하고, 고대 문학이 제시하는 ‘정치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자 합니다.
1. 『일리아드』 속 신의 권력구조와 정치 행위
『일리아드』의 주요 배경은 트로이 전쟁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표면적 이유인 헬레네의 납치 사건은 결국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신들의 경쟁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자신을 선택하면 각각 권력, 지혜, 사랑 중 하나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그녀는 헬레네를 트로이에 데려다줍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미의 경쟁이 아니라, 신들 사이의 체면과 권위의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인간 세계에 전면적인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들이 인간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 선택의 방향을 유도하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묻는다는 점입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함으로써 트로이의 운명을 결정지었지만, 그 선택은 결국 신들의 정치적 갈등에 따른 희생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의지가 의미를 갖기 어렵고, 권력투쟁의 무대에서 인간은 말 그대로 ‘도구’로 전락합니다.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도 신들은 끊임없이 전쟁에 개입합니다. 헤라는 아킬레우스를 돕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아테나는 전략적 조언과 마법을 사용해 전세를 바꾸려 합니다. 포세이돈은 제우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편드는 편에 몰래 개입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신들이 절대적 존재이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로 행동함을 보여줍니다. 신들은 감정적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권력 균형을 고려하며 움직입니다. 제우스조차도 모든 것을 명령하지 않고, 다른 신들의 반발과 균형을 신경 쓰는 ‘조정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신계의 권력분립’이라 부를 만한 구조로, 고대 그리스의 다신론 세계관 속 정치적 리더십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제우스가 헥토르의 죽음을 막고 싶어 했지만, 다른 신들의 반발을 고려해 결정을 보류하고, 결국 모이라(운명)에 따라 그를 죽게 내버려 둡니다. 이는 권력자도 ‘질서’라는 더 큰 정치적 규범 안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 세계에서는 법과 전통이 왕보다 우선되었고, 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현대의 입헌주의적 사고와 닮은 점도 있습니다.
2. 『오디세이』 속 귀향과 신의 권력 역학
『오디세이』에서는 신의 정치가 보다 은밀하고 복잡하게 작용합니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단순한 항해가 아니라, 신들의 승인과 방해가 교차하는 외교적 전쟁과도 같습니다. 핵심적인 갈등은 포세이돈과 아테나 사이의 대립입니다. 포세이돈은 아들 폴리페모스를 실명시킨 오디세우스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으며,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반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자신이 아끼는 인간’으로 여기며 그의 귀향을 돕습니다. 아테나는 단순히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능숙한 신입니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설득을 통해 오디세우스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헤르메스를 보내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명령하게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명백히 정치적인 ‘로비’와 ‘외교’의 성격을 띱니다. 신들은 인간의 문제를 둘러싸고 명분, 감정,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외교적 협상’을 벌이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방해하거나 돕는 데 있어 신들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여 붙잡아두려 하고, 헤르메스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를 풀어주라고 하지만, 동시에 칼립소의 항의도 경청합니다. 이는 신의 명령조차 절대적이지 않으며,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에 따른 타협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신의 세계는 단일 권력체가 아니라, 복수의 권력 주체들이 존재하는 다중 권력구조입니다. 또한, 페니로페의 구혼자들이 오디세우스를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는 가운데, 아테나는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돕고자 위장, 거짓말, 시험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녀는 직접 싸우기보다는 인간의 선택을 유도하고, 사건의 방향을 조정하는 ‘정치적 중개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오디세이』에서 신은 전쟁 영웅을 도와 싸우는 존재라기보다, 정보를 조율하고 인간을 조정하며, 사건을 설계하는 ‘정치 기획자’로 재현됩니다.
3. 신의 정치에 희생된 인간들
이러한 정치구조 속에서 인간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신의 정치적 게임에서 말 그대로 ‘말’ 혹은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이는 고대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로, 권력자의 결정은 언제나 그 아래에 있는 다수의 고통을 초래합니다.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와 그리스 양 진영의 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은 있지만, 실상은 아가멤논의 오만, 아킬레우스의 분노, 그리고 신들의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복잡한 정치의 연장선입니다.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죽어가고, 전쟁의 이유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생명을 잃습니다. 이는 국가 간의 정치적 결정이 일반 시민에게 어떤 파괴를 가져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디세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오는 동안 많은 동료들이 죽고, 가족은 불안 속에 기다려야 하며,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모른 채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최후에는 몰살당합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신이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의도가 사건을 설계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의 결정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로 표현됩니다.
4. 호메로스가 그린 정치의 본질
호메로스는 이와 같은 신의 정치구조를 단순히 신화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빌려 정치라는 시스템의 본질을 통찰했습니다. 정치란 다수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감정과 논리가 공존하며, 결과적으로 그 아래 약자에게 고통을 안기는 구조라는 점을, 그는 서사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된 존재입니다. 인간처럼 이기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며, 경쟁하고, 조율하며, 때로는 위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현실적인 정치권력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며, 호메로스는 신의 행동을 통해 정치의 근본 구조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독자에게 ‘이것이 바로 권력의 본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현대 정치 역시 공식적으로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 세력의 이익, 이미지, 외교적 입장 등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결정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가장 약한 이들에게 돌아옵니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바로 이 점을 정확히 형상화한 존재들이며, 그들의 세계는 정치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전쟁보다 더 냉혹한 ‘신의 정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단지 전쟁과 모험의 이야기로만 읽혀서는 안 됩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고통을 좌우하는, 때로는 전쟁보다 더 잔혹하고 냉혹한 ‘신의 정치’가 숨어 있습니다. 신들은 인간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더 자주 자신들의 감정, 권력, 자존심을 위해 인간의 삶을 조정하고 희생시킵니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은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라기보다, ‘운명에 저항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호메로스는 신화를 빌려 정치의 본질을 말했습니다. 권력의 논리는 언제나 감정, 이해관계, 이미지, 경쟁, 설득, 조정으로 이루어지며, 그 희생은 늘 약자의 몫입니다. 고대 신들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정치와 닮아 있다는 사실은, 고전이 가진 통찰의 깊이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