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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전쟁 vs 신들의 전쟁: 누가 누구를 이용했나

by 집주인언니 2025. 9. 10.

인간 전쟁 vs 신들의 전쟁 누가 누구를 이용했나 관련 사진

트로이 전쟁은 인간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서사시를 보면, 주요 신들이 전쟁의 양 진영에 개입하고 서로 대립하면서 전장을 결정짓는 주요 행위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신들이 단지 인간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조력자일까? 혹은 인간들이 신을 정치적, 전술적 도구로 활용한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인간 전쟁과 신의 전쟁’이라는 이중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를 이용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세 가지 키워드로 깊이 분석한다.

신의 개입은 인간의 도구였나? – 인간의 전략적 신 이용

고대 그리스의 전쟁 서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신의 존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이다. 제우스, 아테나,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 주요 올림포스 신들은 각각 자신이 지지하는 인간 영웅 혹은 국가의 편에 서며 적극적으로 싸움에 개입한다. 이를 보면 마치 인간이 신에게 조종당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간이 신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듯한 모습도 다수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는 전쟁 초반 아가멤논과 갈등을 빚고 브리세이스를 빼앗기자, 어머니 테티스를 통해 제우스에게 ‘트로이 진영이 이기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제우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즉, 인간의 감정과 명예 문제에 따라 신이 전투의 흐름을 뒤바꾸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신이 전능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신의 힘을 전략적으로 호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종교적 신앙의 형태라기보다는 ‘정치적 협상’에 가깝다. 인간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통해 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신은 이를 받아들이고 인간의 편에서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은 신과의 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설정했으며, 신의 개입은 인간의 욕망과 목적에 따라 동원되는 일종의 자원이었다. 오디세우스 역시 아테나의 도움을 자주 받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방적인 수혜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테나가 신뢰할 만큼의 지혜와 전략적 사고를 지닌 인간으로서, ‘협업’ 관계를 유지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의 은총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조건을 갖추고 신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협상자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정치, 외교에서 강대국의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소국의 태도와도 유사하다. 명목상으로는 강자가 주도하지만, 실제로는 약자가 특정 전략과 협상을 통해 강자의 의도를 움직이는 역학이 존재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인간들은 종교적 수동성이 아니라, 매우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신들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들의 전쟁은 인간의 전쟁과 달랐는가? – 감정, 권력, 질투의 드라마

그렇다면 신들은 왜 인간 전쟁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개입했을까? 단순히 인간을 돕고 싶어서일까? 『일리아드』를 보면 신들 역시 인간 못지않게 질투, 분노, 경쟁, 복수심 등의 감정을 가진 존재들로 묘사된다. 특히 아테나와 아프로디테의 대립은 여성의 질투와 우열 경쟁의 은유처럼 보이며, 제우스와 헤라의 갈등은 가정 내 권력 투쟁을 상징하기도 한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황금 사과 사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의 황금 사과를 두고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가 경쟁을 벌였고, 결국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선택하면서 헬레네를 얻게 되고, 이 사건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즉, 전쟁은 인간의 사랑 문제가 아니라 신들의 감정 싸움에서 출발했다. 전쟁 중 아테나는 그리스 편을 들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와 파리스를 돕는다. 아폴론은 헥토르를 보호하며, 포세이돈은 때로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인간 진영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처럼 신들은 전쟁을 냉정한 초월적 존재로서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감정에 따라 편을 나누고 직접 싸움에 뛰어든다. 심지어 신들끼리 싸우는 장면도 나온다. 전장에서 아테나와 아레스가 싸우고, 아프로디테가 부상을 입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신들 역시 우리처럼 욕망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이로 인해 신화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확대경이 된다. 결국 신들의 전쟁은 인간 전쟁의 메타포이자, 확장된 인간 심리의 투사이다. 신들이라 해서 더 고귀하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격렬하고 이기적인 감정으로 행동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인간 중심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은 절대선이 아니라, 권력과 감정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경계가 무너진 서사 구조 – 인간과 신의 ‘공모’ 관계

『일리아드』와 같은 서사시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엄격한 주종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둘은 하나의 전쟁을 두고 같은 드라마 속의 공동 주연으로 기능한다. 인간의 감정은 신의 감정으로, 신의 갈등은 인간의 갈등으로 반영되며, 이 과정에서 신과 인간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공모 혹은 공진화(co-evolution) 관계를 형성한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와의 협력 속에서 인간의 지혜와 신의 보호가 결합된 전략적 승리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 신의 도구로 쓰인다는 일방적 관점에서 벗어나, 협상, 전략적 동맹, 상호 이해관계라는 현실적 구조를 반영하는 서사적 장치다. 또한 영웅이 신의 혈통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아킬레우스는 테티스라는 여신의 아들이고, 아이네이아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이는 인간과 신의 경계가 생물학적으로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서사 속에서 인간과 신은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 존재로 설정된다. 이러한 구도는 권력과 정체성이 유동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을 은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과 신이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구조는, 당대 사회가 전쟁을 단지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균형과 질서의 문제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갈등은 신의 질서에 반영되고, 신의 감정은 인간 사회의 도덕적, 정치적 문제에 투사된다. 이로 인해 전쟁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서사적·철학적·정치적 장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신의 개입은 '이데올로기', '정당성', '명분'의 상징이다. 정치적 싸움에서 각 진영이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적 진리'로 포장하는 방식은, 고대의 신 개입 구조와 유사하다. 이는 신화가 단지 허구가 아니라, 권력 서사의 구조를 해부하는 도구임을 시사한다.

누가 누구를 조종했는가? 답은 경계 없는 상호 작용

트로이 전쟁에서 신과 인간은 단순히 조종자와 피조종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인간은 신을 전략적으로 활용했고, 신은 인간처럼 감정에 휘둘리며 싸움에 개입했다. 결국 그들은 상호 이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신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 모두 자신들의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호메로스 서사의 다층적인 깊이이자,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인간 드라마의 원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