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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신, 그 위선의 본질 (일리아드, 오디세이, 구조)

by 집주인언니 2025. 10. 31.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신, 그 위선의 본질 (일리아드, 오디세이, 구조) 관련 사진

고대 그리스 문학의 양대 산맥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단순한 신화적 서사를 넘어서, 인간과 신, 운명과 선택, 그리고 서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신은 종종 인간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도움’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과 계산, 그리고 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속에서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신들의 행위 이면에 존재하는 위선의 구조를 파헤치고자 한다.

1. 표면적 도움 속 이중 구조: 신의 개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호메로스 서사에서 신들은 인간의 운명에 깊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 개입은 언제나 인간의 생존이나 행복을 위한 것일까? 『일리아드』를 살펴보면, 신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영웅이나 도시국가를 위해 전쟁에 개입한다. 아테나는 아킬레우스를, 아폴론은 헥토르를 지지하고,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적극적으로 감싼다. 겉보기에는 인간을 돕는 듯 보이지만, 그 행위는 신 자신의 감정, 자존심, 혹은 경쟁심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의 미모 선택에 대한 보답으로 헬레네를 그에게 주고, 이후에도 파리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전장 밖으로 순간이동시켜 구출한다. 이는 인간의 삶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아프로디테가 전쟁의 윤리나 정의에 관심을 보이는 장면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인간을 보호하는 척하면서도, 오히려 더 큰 전쟁의 불씨를 키운 장본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우스 역시 인간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운명의 흐름을 관리하고 ‘올림포스 내부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균형 조절자 역할에 머문다. 그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방관하고, 헥토르의 죽음을 막지 않으며,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테나를 보낼 뿐이다. 그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서사의 구조적 완결성과 신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결정에 가깝다. 이처럼 신의 개입은 단순한 ‘도움’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 속 긴장을 유지하고, 신 스스로의 목적과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연출에 가까우며,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위하는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이로써 ‘도와주는 신’이라는 표면 아래 감춰진 위선의 구조가 드러난다.

2. 『오디세이』에서의 보호라는 이름의 시험: 아테나의 이중성

『오디세이』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돕는 신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그의 귀환을 위해 제우스를 설득하고, 여러 번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여 그를 도운다. 그러나 그녀의 방식은 직접적이고 전지적인 개입보다는, 끊임없는 시험과 우회, 간접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정말 오디세우스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지닌 개입일까?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이타카로 귀환시킬 때, 그의 정체를 숨기고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게 하여 주변 인물들의 반응을 탐색하게 만든다.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길 원한다며, 그의 선택을 유도하고 지켜본다. 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교육적 방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조작적이다. 아테나는 인간의 심리를 시험하고,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의도적으로 제약한다. 더욱이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도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텔레마코스를 독려하여 여행을 떠나게 만들고, 귀환한 아버지를 직접 맞이하게끔 유도한다. 이 모든 것이 진심 어린 배려라기보다는, 영웅서사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신의 연출’에 가깝다. 즉, 아테나는 인간을 돕는다고 하지만, 그 도움은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실험하고 서사를 설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녀는 도우면서 동시에 시험하고, 조율하면서 동시에 관찰한다. 이는 인간에게 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게 만드는 설정이며, ‘도움을 가장한 위선’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3.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신의 존중인가, 방관인가?

호메로스 서사에서 반복되는 설정은 신이 인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돕기도, 죽게 내버려 두기도 하지만, 이는 '운명'이라는 절대 질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이 운명이라는 개념 역시 ‘서사적 장치’에 가깝다. 신은 운명을 언급하며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회피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면피하는 데 이용한다. 헥토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아폴론은 그를 보호하던 중 어느 순간 손을 뗀다. 제우스는 그를 살릴 수도 있었지만, 운명이 정해졌다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과연 ‘존중’인가? 운명을 이유로 인간을 방치하는 태도는 결국 신이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식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그가 수많은 시련을 겪는 동안, 아테나는 종종 그를 도우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러선다. 동료들이 죽을 위기에 처할 때, 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때로 ‘경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개입 방식은 진정한 도움이라기보다, 정해진 틀 속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 '장식적 개입'일뿐이다. 결국 신은 인간의 운명을 관리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거나, 인간의 고통과 선택을 관람하는 위치에 서 있다. 이 구조는 단순한 방관이 아니라, 인간을 이용한 신의 서사적 유희이며, 겉으로 드러난 ‘도움’의 이면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위선이 숨어 있다.

4. 신의 도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학적 기능으로 본 위선

그렇다면 왜 호메로스는 신을 이렇게 위선적으로 그렸을까? 이는 단순히 신을 비판하거나 풍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적으로 볼 때, 신의 이중성과 위선은 서사적 긴장감을 높이고, 인간 중심의 드라마를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독자는 신이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신의 개입에 안도하지만, 그 개입이 완전하지 않을 때 느끼는 절망은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이는 인간의 의지와 고통을 더 극적으로 부각하는 효과를 만든다. 즉, 신의 ‘도움’은 인간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대비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신의 위선은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신이 도와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스스로 선택하게 하거나, 신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서사는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비극성을 함께 부각한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는 신의 방조 속에서 친구를 잃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지혜와 결단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묘사한 ‘도와주는 신’은 단순히 신화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문학적 완결성과 철학적 메시지를 위해 필수적인 존재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인간 편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서사의 재료로 활용하면서, 감정과 운명을 가지고 장기판을 벌이는 존재로 묘사된다.

5. 결론: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신, 그 위선은 우리의 거울이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속 신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과 질서, 혹은 올림포스 내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간에게 개입하거나 방관한다. 그들의 도움은 종종 위선을 동반하며, 인간은 그 도움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시련과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신의 위선은 인간 중심 서사의 필수적 장치이며, 인간의 선택과 비극을 더욱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호메로스는 ‘도움’이라는 행위조차 다층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며,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는 신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호메로스의 신은 ‘절대자’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관찰하며, 때로는 그 속에 개입하지만, 언제나 순수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학 속 연출자이며, 인간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한다. 신의 위선을 통해 인간은 더욱 뚜렷이 주체로 선다. 그리고 그것이 호메로스 서사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