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전쟁과 영웅의 서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들의 고통과 비극이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흐르고 있다. 특히 안드로마케와 헬레네라는 두 여성 인물은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경험하고, 견디며, 받아들인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두고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고통을,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의 선택이 낳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이 글에서는 ‘사랑’, ‘책임’, ‘슬픔’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두 인물이 겪는 고통의 양상을 비교하고, 전쟁 속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고, 기억되는지를 조명해본다.
사랑: 지키려는 마음과 떠나버린 사랑
안드로마케와 헬레네는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다. 안드로마케에게 사랑은 지켜야 할 소중한 것, 헥토르와의 결혼 생활을 통해 쌓아온 안정과 정서적 유대이다. 그녀는 전쟁의 와중에도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를 말리기 위해 용기를 낸다. 트로이 성벽 위에서 헥토르에게 “당신이 죽으면 나는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고대 문학 속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고백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안드로마케의 사랑은 헥토르뿐만 아니라 아들 아스티아낙스에게도 확장된다. 그녀는 가족 전체의 생존을 책임지는 존재로, 남편의 죽음 이후 다가올 미래까지 예감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녀의 사랑은 실질적이며 구체적이다.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의 안전, 아이의 생존, 자신의 삶까지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들어 있다. 반면 헬레네의 사랑은 모호하고, 위태롭다.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였으나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쳤고, 그 결정은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파리스를 사랑했는가에 대한 논란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호메로스는 그녀가 후회하는 듯한 모습도, 여전히 파리스를 애틋하게 여기는 장면도 그려낸다. 헬레네의 사랑은 한편으로는 선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숙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수많은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안드로마케의 사랑은 ‘지켜야 할 것’이며, 헬레네의 사랑은 ‘떠나온 것’이다. 전자는 사랑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고, 후자는 사랑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이탈한다. 안드로마케는 수동적 피해자였지만, 사랑을 통해 강해졌고, 헬레네는 능동적 선택자였지만 사랑 속에서 무너졌다. 이 대조는 고전 속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감내해야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두 여성의 사랑은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랑이 때로는 희생과 책임을 동반하고, 때로는 죄책감과 후회를 낳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고대 문학이 전하는 감정의 깊이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전쟁이라는 비인간적 상황 속에서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띠며, 안드로마케와 헬레네는 그 감정의 무게를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다.
책임: 무너진 터전 vs 무너뜨린 결정
전쟁 속에서 여성은 종종 ‘피해자’로만 그려지지만, 『일리아드』는 그들이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안드로마케와 헬레네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책임’을 감내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 책임의 성격과 방향성은 정반대다. 안드로마케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지만, 전쟁의 결과로 가장 많은 것을 잃게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헥토르가 죽으면 자신의 삶 또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편의 죽음은 곧 보호자의 부재, 사회적 지위의 붕괴, 자녀의 미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헥토르에게 전장에 나가지 말라고 간청하지만, 그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무력함 속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가족을 지키기 위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녀의 책임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안드로마케는 그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이후 비극적 서사에서 그녀는 포로로 끌려가고, 아들을 잃고, 전쟁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지만, 끝까지 삶을 이어가며 트로이 여성의 존엄을 보여준다. 이는 ‘수동적 희생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고통 속에서도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면 헬레네는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따랐지만, 그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트로이에서 외부인의 시선을 견뎌야 했고, 내부에서는 파리스의 연인으로 간주되어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녀가 종종 자책하거나, 펜elope와 비교되며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은 그녀의 내적 갈등을 드러낸다. 헬레네의 책임은 본인의 선택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그녀의 고통은 외적 피해가 아니라 내적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야기한 결과를 직시하며 살아간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상이다. 그녀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 자기 반성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적 존재다. 결과적으로 안드로마케는 외부에서 주어진 책임을 감내하고, 헬레네는 내부에서 발생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이 차이는 고전 문학에서 여성 인물들이 어떻게 입체적으로 그려지는지를 보여준다. 둘 다 단순한 피해자도, 악역도 아니다. 각각의 고통은 각기 다른 책임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다.
슬픔: 침묵의 눈물 vs 말로 표현된 자책
고전 문학 속 여성의 슬픔은 종종 ‘조용한 울음’으로 묘사된다. 안드로마케는 대표적인 예다. 그녀는 남편 헥토르가 죽은 뒤 절망에 빠지지만, 그것을 과하게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녀의 슬픔은 침묵 속에서 더 깊이 스며든다. 성벽에서 헥토르의 시신을 기다리며 우는 장면,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은 안드로마케의 슬픔이 얼마나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절실한지를 보여준다. 이 침묵은 단지 감정 표현의 부재가 아니라, 그녀가 여성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엄의 방식이다.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체념과 침묵 속에서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허용된 한계 안에서 가능한 저항이자 표현이었다. 이 침묵 속의 눈물은 독자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 말없이 감내하는 고통, 그것이야말로 안드로마케가 보여주는 ‘전쟁 속 여성의 진짜 비극’이다. 반면 헬레네의 슬픔은 자책이라는 언어로 구체화된다. 그녀는 자신이 트로이에 왔다는 사실, 파리스와의 관계, 이로 인해 발생한 전쟁을 자주 언급하며 후회와 슬픔을 토로한다. 그녀는 헤카베나 프리아모스 앞에서, 또는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기도 한다. 그녀의 말에는 단지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존재할 자리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이 담겨 있다. 헬레네의 슬픔은 감정의 흐름이자,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녀는 파리스를 따라온 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프로디테의 조종 때문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 모호함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타인에게 해명하려 들고, 결국 말 속에 감정을 투영한다. 이 말들은 독자에게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며, 단순히 ‘전쟁의 원인’이라는 낙인을 넘어선 인간적 고뇌를 전달한다. 이처럼 안드로마케의 슬픔이 ‘내면화된 고통’이라면, 헬레네의 슬픔은 ‘설명하고 싶은 감정’이다. 하나는 표현되지 않아 더 아프고, 다른 하나는 표현되어서 더 복잡하다. 고전 문학은 이 두 여성의 슬픔을 통해, 감정의 양상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여성의 고통은 단순히 피해의 크기로만 측정될 수 없다는 점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 두 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의 상처를 견딘다. 안드로마케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며 침묵으로 고통을 담고, 헬레네는 말로 자책하며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고통이지만, 그 고통을 표현하고 감내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것이 고전이 전하는 진정한 인간성의 깊이다.
안드로마케와 헬레네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했다. 사랑을 지키려는 자와 떠나온 사랑을 짊어진 자, 책임을 강요받은 자와 스스로 만들어낸 책임을 지는 자, 침묵으로 견딘 자와 말로 고백한 자. 이 둘의 삶은 비극적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복잡한 감정과 고결한 내면이 담겨 있다. 고전은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