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티메(Timē)’라고 불리는 명예와 존경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러한 영웅들의 명예관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특히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두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티메를 추구한다. 이 글에서는 ‘명예’, ‘선택’, ‘죽음’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두 인물의 티메 개념이 어떻게 다르게 형성되고, 그것이 어떤 삶의 태도와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해 본다. 고대 영웅의 티메는 단지 칭송을 받는 것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거울이 된다.
명예: 아킬레우스의 불멸 vs 헥토르의 공동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명예’에 대한 해석과 추구 방식이다. 아킬레우스는 티메를 ‘개인의 영광과 불멸’로 해석한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오래 살지만 평범하게 죽을 것인가, 혹은 젊은 나이에 죽지만 영원히 기억될 것인가. 아킬레우스는 후자를 택하며, 자신의 명예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길 원한다. 그의 명예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는 아가멤논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자 전장에서 이탈하고, 싸움을 거부한다. 이는 단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내 명예는 타인에 의해 침해당할 수 없다’는 자존의 선언이다.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는 외부의 칭송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개인주의적 영웅관을 대표하는 동시에, 신화 속 인물이지만 현대적인 인간상에 가까운 복합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반면 헥토르의 티메는 공동체 중심이다. 그는 트로이의 수호자이며, 왕자이자 장군으로서 시민들의 기대와 가족의 안녕을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의 명예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는 싸움에 나설 때마다 자신의 가족,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떠올리며, 그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문을 나서고, 트로이의 장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헥토르에게 명예는 ‘타인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속한 이 공동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불멸’을 꿈꾸지 않지만, 그의 죽음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준다. 명예를 쫓되, 그것이 인간관계와 책임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헥토르의 티메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띤다. 두 인물 모두 명예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기반하는 철학과 세계관은 극명히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초인적 존재로서 개별적 이상을 추구하고, 헥토르는 인간적 존재로서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한다. 이 대비는 고전 문학 속에서 명예 개념이 얼마나 다양한 층위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독자에게 진정한 ‘존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선택: 운명을 자각한 결단과 갈등
『일리아스』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치는 ‘선택’이다. 고대 영웅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모두 운명의 장벽 앞에서 자신의 길을 택한 인물이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택 방식과 내면의 갈등은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 아킬레우스는 운명을 미리 아는 영웅이다. 그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는 의식적으로 더 고통스럽고 위험한 길을 택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단순히 용기의 표현이 아니다. 그의 선택에는 깊은 내면의 갈등이 담겨 있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분노에 휩싸여 전장에 복귀하지만, 이는 명예의 회복이라기보다는 친구를 잃은 죄책감과 복수심이 얽힌 감정적 결정이다. 그는 헥토르를 죽이고 난 뒤에도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며,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 선택은 ‘명예를 위한 결단’이자, ‘감정의 해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선택은 이성과 감정, 명예와 복수, 죽음과 불멸 사이의 복합적인 딜레마를 품고 있다. 반면 헥토르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지만, 그 선택이 감정의 격동보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그는 성벽 안에서 머무를 수도 있었고, 가족과 함께 도피할 수도 있었지만, 트로이 시민과 병사들, 그리고 아버지 프리아모스를 위해 ‘성문을 나선다.’ 이 선택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위엄 있는 결단이다. 헥토르의 선택은 영웅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의 내면에서는 공포와 의무가 충돌하지만, 결국 그는 후자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단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삶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선택은 각기 다른 철학적 태도를 드러낸다. 아킬레우스는 자아실현을 위한 선택을 통해 신화적 존재로 나아가고, 헥토르는 타자를 위한 선택을 통해 인간적 깊이를 획득한다. 이 두 방향성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균형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선택은 단지 순간의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방식 전체를 드러낸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선택은 각각 ‘불멸의 이름을 남기는 삶’과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삶’이라는 두 개의 길로 이어지며, 그것은 모두 존경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존경의 방식은 각기 다른 결을 지닌다.
죽음: 비극인가, 완성인가
영웅 서사에서 죽음은 단지 생의 끝이 아니라, 인물의 삶을 완성시키는 결정적 순간이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간 인물이며, 그 죽음의 방식은 각각의 삶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 앞에서 취한 태도는, 그들이 추구했던 티메의 궁극적 성격을 드러낸다. 아킬레우스는 『일리아스』에서 죽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그가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으며, 그의 생애는 이미 ‘죽음이 예정된 존재’라는 전제 속에서 전개된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전장으로 돌아가 헥토르를 죽인다. 그리고 그 복수는 단지 한 명의 전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싸우며, 결국 파리스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불멸의 명예’라는 티메를 획득하는 완성의 순간이다. 그는 신이 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신에 가까운 기억을 남기고 떠난다. 그의 죽음은 ‘불멸을 향한 인간의 투쟁’으로 상징화되며, 고대 영웅의 정점으로 기록된다. 반면 헥토르의 죽음은 독자 눈앞에서 명백하게 펼쳐진다. 그는 아킬레우스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시신은 전장의 한가운데서 끌려다닌다. 헥토르의 죽음은 치욕적이고 잔인하며, 외형적으로는 패배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주는 울림은 오히려 더 강력하다. 그는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죽음을 알면서도 싸움을 택했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며,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존엄을 보여준다. 헥토르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이다. 그는 신화적 존재는 아니지만, 모든 인간이 본받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닌, 윤리적 승리로 기억된다. 이처럼 두 죽음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티메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킬레우스는 개인적 명예를 극대화한 영웅으로 죽고, 헥토르는 공동체적 책임을 다한 인간으로 죽는다. 두 죽음 모두 찬란하며, 그 자체로 문학적 상징이 된다. 이 죽음을 통해 독자는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한다. 진정한 존경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나의 삶은 어떤 방식의 죽음을 향하고 있는가? 영웅의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서사의 정점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죽음은 그들이 살아온 방식,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명예의 의미를 우리에게 깊이 있게 전한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티메를 추구하고 실현했다.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명예를 향한 신화적 인물이며, 헥토르는 현실 속 인간의 책임과 용기를 보여준 존재다. 이 두 인물은 고대 그리스 문학을 넘어서, 오늘날까지 ‘존경’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는 명예란 무엇이며, 어떤 선택이 진정한 가치를 남기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