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길가메시 서사시』는 각각 고대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류 최초의 문학이자 지금까지도 인문학적 통찰의 보고로 남아 있습니다. 두 서사시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는 전사, 왕, 반신(半神), 친구의 죽음을 겪은 자, 그리고 결국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 두 고대 영웅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서사 속에서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불멸에 대한 욕망: 기억되고자 하는 인간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다릅니다.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전장에 나가면 명예로운 죽음을 맞지만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고향에 남으면 오래 살 수 있지만 이름 없이 잊힐 것입니다. 그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전사의 충동이 아니라, 기억과 명예에 대한 욕망의 표출입니다. 반면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길가메시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멸을 추구합니다. 그는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 육체적 영생을 얻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그는 ‘기억 속의 영원함’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불멸을 받아들입니다. 왕으로서 도성을 건설하고, 문명을 남기며,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두 영웅은 같은 목표를 지향합니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전장의 죽음을, 길가메시는 문명과 기록을 선택합니다. 그들의 욕망은 인간 본성이 지닌 “시간을 넘어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그 표현 방식은 각 문명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2. 관계에서 비롯된 욕망: 친구의 죽음이 만든 영웅의 변화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 모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삶의 태도와 방향이 전환됩니다. 그들의 욕망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자 전장에 복귀합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칼을 들지만, 그 분노는 단순한 전투 욕망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자책, 상실감, 애도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파트로클로스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반쪽을 잃은 셈이며, 이때부터 영웅으로서의 행동이 비로소 진정성을 띱니다. 길가메시에게 있어 엔키두는 야성적 삶에서 인간적 윤리로 이끄는 존재이며, 그의 진정한 동반자입니다. 엔키두의 죽음은 길가메시에게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만든 사건이며, 길가메시의 욕망을 철학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다가, 점차 그것을 이해하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조건으로 수용합니다. 이처럼 두 서사에서 ‘타인의 죽음’은 주인공의 욕망을 각성시키는 촉매제입니다. 인간은 홀로 완성되지 않으며, 누군가를 잃음으로써 삶과 욕망의 의미를 다시 정의합니다.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며, 그 애도는 결국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만듭니다.
3. 권력과 자기중심성의 욕망: 신과 같은 인간 vs 인간적인 신
초기 서사에서 두 인물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를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전투를 거부하고, 길가메시는 폭군으로서 도시를 다스립니다. 이들은 모두 권력의 중심에 있으며, 자신을 절대적 존재로 인식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신의 혈통을 지녔고, 그 누구도 자신과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가멤논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전체 전쟁을 외면합니다. 이는 단지 ‘분노’라기보다는 ‘존재의 무게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사로서의 가치, 명예, 영향력을 가장 중요시하며, 스스로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인식합니다. 길가메시 역시 신과 인간의 혼혈로 태어나, 도시 우루크의 왕이자 절대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서사 초반 그는 신부를 차지하고, 전제적 지배를 행사하는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엔키두와의 만남 이후, 그는 권력을 넘어 인간적 관계와 내면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신이 되고자 했던 자신을 내려놓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인물은 모두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해, 인간적인 성찰로 나아가는 여정을 겪습니다. 그들은 결국 욕망의 방향을 바꾸고,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이는 고대 서사 속에서도 권력만으로는 인간을 완성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4. 고통과 성장의 욕망: 영웅의 진정한 길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는 모두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의 욕망은 ‘더 강해지고 싶다’는 단순한 전사의 욕망에서 시작되지만, 이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 나은 존재, 더 깊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갈망으로 전환됩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며, 헥토르의 죽음 이후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를 받아들입니다.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 꿇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이 장면은 아킬레우스가 복수와 명예를 넘어, 공감과 인간애로 성장한 순간입니다. 길가메시는 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자기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고, 괴물을 물리치고, 슬픔과 절망에 빠지지만 결국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불멸을 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두 인물 모두 고통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고, 그 과정을 통해 더 깊은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이 고통과 성장의 과정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장치입니다.
결론: 고대의 영웅, 오늘의 우리를 비추다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는 서로 다른 문명, 다른 시기,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난 인물이지만,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욕망은 단순히 싸우고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살아 있는 동안 의미를 찾고 싶은 인간 본연의 갈망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통해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자 했고, 길가메시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며,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길 원합니다. 고대 서사시는 오래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아킬레우스와 길가메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