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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 속 전쟁 서사 구조와 평화의 반어성

by 집주인언니 2025. 9. 11.

『일리아드』 속 전쟁 서사 구조와 평화의 반어성 관련 사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전쟁을 찬미하는 작품일까요, 아니면 전쟁을 비판하는 고전일까요?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학자와 독자에게 던져졌으며, 그 대답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리아드』는 영웅들의 전투와 명예, 신들의 개입, 인간 감정의 격돌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 숨어 있는 비극성과 반어성을 통해 오히려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 글에서는 『일리아드』의 전쟁 서사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반어적 평화 메시지를 세 가지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 봅니다.

1. 영웅서사의 구조 속에 숨은 비극성과 허무

『일리아드』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구조를 따릅니다.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등 각각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동기와 방식으로 전장에 참여하고, 전투는 인간의 명예와 생존, 가문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 영웅담의 중심에는 명예와 승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죽음과 파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킬레우스의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그에 따른 아킬레우스의 복수는 장엄하게 서술되지만, 동시에 비극적 무력감도 함께 전해집니다.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통해 명예를 되찾았지만, 그는 친구를 잃었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서사는 단순히 ‘영웅의 승리’가 아니라, 그 승리 이면의 존재적 상실을 드러냅니다. 호메로스는 반복적으로 전사들의 죽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한 영웅이 죽을 때마다 그는 어디에 칼을 맞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쓰러졌는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까지 설명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 죽음을 숫자가 아닌 인간의 서사로 받아들이게 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더욱 실감 나게 합니다. 또한 『일리아드』는 ‘승리의 장면’보다 ‘죽음의 무게’를 더 강조합니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인 후 시신을 훼손하는 장면은 그의 감정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승리의 기쁨이 아닌 인간성의 붕괴를 강조합니다. 이는 전쟁 영웅의 모습이 아닌, 상실감에 휩싸인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고통이 과연 가치 있는가?” 호메로스는 직접적으로 ‘전쟁은 나쁘다’고 말하지 않지만, 전쟁이 만들어낸 상처와 허무함을 서사 속에 침묵으로 각인시킵니다. 이 침묵과 반복은 오히려 평화의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2. 신들의 개입과 인간성 상실의 메타포

『일리아드』에서 신들은 거의 모든 전투에 개입합니다. 제우스, 아테나, 아폴론, 아프로디테 등 각 신은 자신이 지지하는 인간 영웅 혹은 국가를 도우며 전장의 판도를 바꿉니다. 하지만 이 개입은 공정하거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신들 간의 경쟁, 감정, 질투, 심지어 오락적 개입에 가깝습니다. 즉, 신들의 전쟁 개입은 인간 전쟁의 윤리적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예컨대,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돕기 위해 헬레네를 강제로 데려오고, 아테나는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에서 헥토르를 속여 죽음으로 유도합니다. 이는 전쟁이 단지 인간 간의 대립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들의 감정 놀음에 휘둘리는 허약한 게임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줍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신들의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기심과 변덕,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부각합니다. 이는 전쟁이 ‘정의’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무의미한 감정의 연쇄 반응으로 작동한다는 메시지를 반어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신들의 개입은 인간의 ‘선택’이라는 개념을 무력화시킵니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전장에 나서지만, 그의 죽음은 신들의 무관심 속에 무의미하게 처리됩니다. 헥토르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에 끌려 죽음을 맞습니다. 이는 전쟁이 인간의 의지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운명의 장난 속에 인간이 소모되는 구조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구조 속에서, 오히려 인간다움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장면—예를 들어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더욱 빛납니다. 이 장면은 비극의 정점을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전쟁 너머의 윤리적 회복 가능성, 즉 ‘평화’라는 가치를 암시합니다. 호메로스는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가장 극단적인 비극의 순간에 배치함으로써, 전쟁의 부조리함을 더욱 부각하는 동시에, 평화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3. ‘명예’의 허상과 공동체의 해체

『일리아드』의 전쟁 서사는 끊임없이 ‘명예(timē)’라는 개념을 중심에 둡니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에 나서는 것도, 아가멤논과 갈등을 빚는 것도 모두 명예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명예는 공동체를 위한 가치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존심과 영광에 집중된 허상에 가깝습니다. 아킬레우스는 공동체를 떠나면서 수많은 그리스 병사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는 명예를 빼앗긴 것에 분노하며,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빼앗긴 모욕이 자신을 존재 부정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이 분노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감정의 폭발입니다. 결국 그는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명예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해체하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헥토르 역시 트로이를 위해 싸우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과 도시를 모두 잃고 맙니다. 그의 명예로운 전투는 후대에 전해질 전설은 남기겠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싸움이 됩니다. 또한 『일리아드』는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끝이 없는 것’, ‘목적 없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 안에서 명예는 ‘목적’이 아니라 무한히 되풀이되는 동기로 전락합니다. 이는 명예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어적 비판이며, 명예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결국 모두 상처 입고 무너지는 서사 구조를 통해 평화의 가치가 역설적으로 부각됩니다. 결국 『일리아드』의 전쟁 구조는 화려하고 장엄하지만, 그 내부는 허무, 상실, 파괴로 가득합니다. 이 점에서 고대의 전쟁 서사는 단순한 영웅 이야기라기보다는, 비극을 통해 평화를 성찰하게 하는 문학적 장치로 작동합니다. 특히 현대의 반전문학이 전쟁을 부조리한 체험으로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일리아드』 역시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비극이기에 평화는 더 선명해진다

『일리아드』는 전쟁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화려한 서사 속에 비극과 허무, 인간의 파괴와 감정의 폭주를 그려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호메로스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공동체의 한계를 보여주며, 그 반어적 방식으로 평화의 가치를 더욱 또렷이 각인시킵니다. 비극은 때때로 가장 강력한 평화의 언어가 됩니다.